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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디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1-15)
운영자 2024-07-26 추천 0 댓글 0 조회 82
[성경본문] 요한복음6:1-15 개역개정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4.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721일 주일낮설교요약문

 

제목: 우리가 어디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본문: 6:1-15

 

  어른이 자녀들이나 친척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대접하기를 기뻐하는 집안은 우애도 깊어지고 서로 사랑을 나누는 집안이 된다. 그러나 맞이하는 사람이 힘들어하고 수고하기를 꺼리면 그러한 집안은 모이기가 힘들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주님 앞에서 나와서 주님의 풍성한 사랑을 알고 사랑의 대접을 받으며 영생을 누리는 자는 어려운 세상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전하며 사랑으로 섬기며 살 수 있다.

  주님을 만나 사랑을 받고 대접을 받은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노래하고 고백했다.

  주님은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주님의 큰 사랑을 알고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며 대접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시는 중에 많은 병자를 치료해 주셨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고쳐주시고, 예루살렘에서 베데스다 못 가에서 38년 된 환자를 걷게 하셨다. 이러한 표적을 본 큰 무리가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 가시매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물으셨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었다.

 

빌립은 가장 가까운 벳세다(1:44) 출신이므로 그 지방에 관하여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어디서로 물으셨는데 빌립은 얼마나로 대답했다. 동문서답이다. 예수님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우리가로 물으셨는데 빌립은 자기 계산과 생각으로 부정적으로 답변을 한 것이다. 빌립의 계산은 정확했으나 그의 계산에는 주님이 없었다. 결국 2백 데나리온이 없으므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다. 양식이 어디에서 오느냐의 물음에 얼마의 양식이 필요하냐의 문제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대답을 책망하지 않으셨다. 빌립의 오해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는 예수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고 여쭈었다. 안드레도 부정적으로 대답하긴 했으나 예수님께 형편을 이야기하고 여쭈었다. 빌립은 얼마나 큰 무리인지를 본 반면, 안드레는 구할 수 있는 음식의 양을 본다.

  누구든지 자신의 능력과 계산만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는 매우 힘들거나 불가능하지만, 예수님께 모든 사정을 아뢰고 전적으로 맡기게 되면 실로 보잘것없는 것도 위대한 가치를 발휘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제자들의 답변은 사람들의 숫자와 미미한 자원을 고려하지 않은 예수님을 가볍게 비난한 것이다.

 

  예수님은 해결책을 제시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제자들이 순종해서 앉게 하니 그곳이 잔디가 많아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예수님은 사람이 많은 것이나 자원이 적은 것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식사를 위해 사람들을 앉게 하라고 지시한다. 관대하지만 순진한 선생에 대한 제자들의 비난에 예수님은 사람들이 먹을 준비를 하게 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셨다. 예수님이 떡과 물고기를 취하사 감사기도를 하시고 그것을 큰 무리에게 나눠주셨다. 공관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나누어주는 것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지 않으시고 직접 공급하셨다. 오직 주님만이 사람들을 위해 양식을 공급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떡과 물고기를 공급받은 사람들이 그들의 원대로받았다. 먹이려면 반년 품삯 이상이 드는 큰 무리에게 충분히 배부를 정도의 풍성한 잔치를 베풀어주셨다. 예수님이 풍성한 손대접을 베푸는 주인이심을 보여준다. 빌립의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생각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셨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만나를 공급하셨듯이 친히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떡을 주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생명의 떡을 나눠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한 것이다.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다. 이것은 예수님이 얼마나 풍성하게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시는가를 나타낸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첫 질문에 그분을 가볍게 비난하던 각 제자는 남은 조각이 든 자기 몫의 바구니를 들게 되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말했다. 모세가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였는데 그 선지자가 예수님이심을 무리들이 인식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18:15). 이 사람들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바리새적인 희망인 정치적 메시야로 믿었다. 선지자적인 왕으로 본 것은 옳았지만 세상적인 왕으로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세상적인 의미의 왕으로 본 것은 잘못이다. 이때 예수님이 그들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자신이 선지자적인 왕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세상적 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혼자 산으로 가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은 이 표적으로 당신이 생명의 떡으로 오셨음을 보여주고자 하셨다. 그러나 백성들은 영적인 차원이 아니라 육적인 충족의 차원에서 오해하고 예수를 강제로 왕으로 삼으려 했다. 오병이어 표적으로 사람들이 예수를 간절히 찾지만, 예수께서 의도하는 표적 때문이 아니라 세상적인 욕구 때문이었다(26).

  유대인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손대접에는 자신의 인상적인 계획과 바람을 성취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하지만 참된 주인은 인간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에 따르심으로, 그분의 손대접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의도를 아시고 혼자 산으로 가셨다. 그분은 사람을 아시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24~25).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늘로서 온 생명의 떡이심을 알기를 원했으나 무리들과 제자들을 알지 못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6:41).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택하셨다.

 

  예수님은 오실 그 선지자이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그 피를 쏟아주신 생명의 떡이요 생수이시다. 이 예수를 바로 믿고 알 때 영생을 얻을 뿐 아니라 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생명의 떡이신 주님을 기쁘게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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